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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경향신문 : 엄기호의 단속사회] 무력, 무기력 그리고 ‘필리버스터’

무기력하고 못났다. 개혁적이거나 진보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제 1야당의 모습은 딱 이랬다. 거대여당에 끌려다니기만 했다. 협상다운 협상도, 싸움다운 싸움도 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. 과반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그들의 모습은 ‘아무것도 못한다’가 아니라 ‘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’에 가까웠다. 그 과정에서 진보적인 사람들 역시 점점 더 무기력해졌다.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치가 가능은 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. 소수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. 미래를 위해 지지하지만 현재의 선거제도와 사회적 환경에서 한두 석을 얻기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다. 선거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제 1야당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들이 무기력하게 물러나기만 하니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. 그런데 무기력하게만 보이던 제 1야당이 사고를 쳤다. 필리버스터다. 시민들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해 무제한 토론에 나선 것이다. 물론 처음엔 “저런다고 뭐가 바뀌나” “얼마 못 가겠지” 하는 냉소가 먼저 흘러나왔다. 지지하는 사람들도 응원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지켜봤다. 그런데 첫 번째 주자였던 김광진 의원부터 예상을 뛰어넘는 ‘말’이 나왔다. 사람들은 “아니,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이렇게 똑똑했단 말이야?”라는 반응을 보이며 ‘말’을 듣고 그 ‘말’을 옮기며 서로 ‘말’을 하기 시작했다. ‘말’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나의 입장에서 이건 거의 ‘기적’처럼 보였다. 말이 말로 대접받는 걸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. 정치뿐만이 아니다. 일상생활에서도, 강의실에서도 가면 갈수록 말은 무기력했다. 말이 무력하다는 걸 간파한 순간 사람들은 말을 개똥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했다. 도통 말 같지도 않은 말이 난무했다. 말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못했다. 편의에 따라 말을 언제든 이리저리 바꾸는 건 이제 ‘스캔들’이 되지도 못했다.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. 부끄러움을 잃어버리는 순간 말은 ‘무력’한 것에서 ‘무기력’한 것으로 추락했다.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예 입을 닫았다. 말할수록 자괴감만 늘었기 때문이다. 사람을 통치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법이 무력한 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. 내가 이러이러한 힘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기력에 빠지면 그 다음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진다. 한번 무기력에 빠지면 그 무기력한 상황을 단번에 바꿀 수 있을 정도로 ‘큰 힘’이 생기지 않으면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.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면 무기력에 빠져 있는 한 ‘큰…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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